장미의 이름


두번째 읽는 것인데 이번에는 정독을 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다. 작자는 우리를 1300년대로 초청하여 그 당시의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여 주는데, 그 지식과 혜안에 감탄을 하지 않을수 없다. 독자가 당시의 역사를 조금만이라도 알고 있다면 10배는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교황과 황제, 프란시스코,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파워게임. 이단에 대한 당시 시각, 수도사들의 생활상. 그 시대 전 그리스나 이방 지식과 관습을 보는 여러가지 관점. 그 모든 것이 잘 버무려져 12세기 중세의 모습 속에 긴장감있는 스토리가 심도있게 펼쳐진다.

아랫글은 소제를 붙힌다면 아드소의 깨달음이라 해야 할까?  지극히 순진한 수도승이 처음으로 여인을 알고 연정이란 감정을 안 후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자신의 깨달음을 논한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자니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허무는 짓이 될것이고, 이에 이성의 힘을 빌어 안간힘을 다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바른 자신을 세우고자 하는 그 노력이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나를 흐믓하게 한다.

 

 

3일 3시과에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쓰신 서책과 같은 것이다. 이 서책에서는 만물이 우리에게 창조자의 크신 은혜를 전한다. 바로 이 서책에서 만물은 삶과 죽음의 다른 얼굴이자 거울이 되며, 바로 이 서책에서 한 송이 초라한 장미는 온갖 지상적 순행의 표징이 된다. 그 서책에서 그렇듯이 그날 아침 내가 만난 만물은 나에게, 그날 주방의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 여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환상이 싫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비록 하찮은 존재이기는 하나, 세상을 향하여 창조주의 권능과 자비와 지혜를 증거하게 마련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날 아침 만물은 나에게 그 여자의 모습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비록 죄인이기는 하나 그 여자 역시 위대한 창조의 이야기가 실린 서책의 한 장이요, 우주가 음송하는 위대한 시편의 한 구절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여자 역시 한 자루 피리처럼 우주를 조화와 화음으로 채우는 하느님 뜻의 한 자락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으면서, 내 눈앞에 보이는 만물의 형상을 즐거움으로 누리면서 원근의 풍경에서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탐닉했다.

그런데 서글펐다. 수많은 사물을 통하여 보고 누렸다고는 하나 허상일 뿐, 역시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 모순을 풀어서 설명할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이란 참으로 나약한 것이다. 세상은, 완벽한 삼단 논법의 세계를 세운 신성한 이성의 도정이지만 인간의 정신에는 그 삼단 논법을 따르는 대신 그 논법에서 이탈하여 저에게 유리한 명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악마의 농간에 넘어가는 것일 터이다.

하면, 그날 아침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던 그 여자에 대한 상념 역시 악마의 농간이었더라는 말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신분이 수련사였다는 데 있다. 내가 수련사만 아니었다면, 인간의 마음에서 인 그런 격정 자체는 크게 허물될 바 아닐 것이다. 남자의 마음에 여자에 대한 그러한 격정이 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래야 이방의 사도들이 바라듯이 육과 육이 만나 새로운 인간이 지어지면서 선거하는 세대가 있고 후래하는 세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방의 사도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보아 준 것은 우리 같이, 동정 지키기를 서원한 사람이 아닌 속인들에게 한하기는 한다.

나는 누구인가? 동정을 지키기로 서원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날 아침의 격정이 나에게는 사악한 것이나 속인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내가 느낀 갈등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서원을 세운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나는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사악한 것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러면 나의 허물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여는 인간에게는 당연한 정욕이라고 해서 내 영혼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 그것이 나의 허물이었다. 이제 나는, 의지의 작용이 끼여든 엄연한 지적 갈등과, 인간적인 정열에 종속되어 있는 감성적 갈망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일찍이 아퀴나스가 갈파했듯이, 감성적인 욕망으로 인한 행위가 정념이라는 부정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육체적인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천사적인 박학 아퀴나스에 따르면, 정념 자체는 사악한 것이 아니나, 마땅히 이성이 주도하는 의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그날 아침의 내 이성은 어떠했던가? 내 이성은 전날 밤의 불면과, 본질적인 선악의 갈등으로 인한 피로로부터 깨어 있지 못했다. 당시 내가 사로잡혀 있던 저항하기 어려운 갈등 상태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내가 사랑에 들려 있었다고 하는 수 밖에 없겠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갈등의 정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사랑은 우주적인 법칙이다. 무슨 까닭인가? 육체의 무게를 서로 느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랑에 들려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나의 신분에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나에게는 유혹이었는데, 내 허물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데 있었다. 이제야 나는 저 천사적인 박학 아퀴나스의, <사랑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사물을 꿰뚫어 아는 데는 지식이 사랑만 같지 못하다고 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그 까닭은, 느낌만인데도 전날 밤보다 그 여자를 훨씬 분명하게 볼 수 있었고 훨씬 선명하게 그 여자의 안팎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 여자 안의 나 자신과 내 안의 그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아도, 그때 내가 지니고 있던 그 감정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상대의 미덕을 제 것으로 취하고자 하는 우정에서 기인한 사랑의 감정이었는지, 아니면 제 미덕은 따로 두고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에서 기인한 사랑의 감정이었는지 분명하게는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 여자로부터, 내가 갖지 못했던 것을 바랐던 것으로 보아 탐욕에서 기인한 정욕적인 사랑의 감정이었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나는 그 여자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니,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여자의 미덕을 내 것으로 취하기를 바랐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는 그 여자가 얼마 안 되는 식량 때문에 몸을 팔아야 할 정도의 비참한 가난에서 구제되기를 바랐다. 나는 그 여자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랏다. 나는 그 여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양 떼 속에서, 소 떼 속에서, 나무 속에서, 수도원 경내를 말끔히 씻는 차분한 빛 줄기 안에서 그 여자를 생각하고 보았을 뿐이었다.

이제 나는, 선이야말로, 미덕이야말로 사랑의 씨앗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덕은 지성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덕을, 선을 발견한 연후에야 비로소 참사랑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허나 어쩌랴. 당시에는 그 여자를 사악한 의지의 화신이 아닌, 덧없는 갈망의 아름다운 화신으로 알았던 것을…
내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착잡했다. 당연했다. 그 여자와의 덧없는 사랑을, 박학한 신학자들의 이른바 더없이 거룩한 사랑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의 오류에 휩쓸리자 내 안에서 사랑하는 자나 사랑받는 자가 같은 것을 바라는 것과 그 상태가 비슷한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요컨대 나는 그 여자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질투는 바울로가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단죄한 질투가 아니라 아레이오파기테스 디오뉘시오스가 <신명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그런 질투였다. 말하자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이 하시는 것과 비슷한, <사랑하는 것에 참가하는>그런 질투였다. 나는 그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했다(나는 그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을망정 그 존재 자체를 질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여자에 대한 나의 질투는 천사적인 박학 아퀴나스의 이른바 <사랑의 씨앗인 질투>, 사랑하는 자의 위험을 막고 나서는 우애의 질투였던 것이었다.(당시 나는, 그 여자의 육체를 삼으로써 제 사악한 정념을 또 한번 더럽히는 자의 손아귀로부터 그 여자를 구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야 나도, 사랑이 지나치면 사랑하는 자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저 박학한 아퀴나스의 말귀를 알게 되었다. 내 사랑은 바로 그런 지나친 사랑이었다. 말이 길어졌지만 나는 당시의 내 느낌을 되도록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한 것이지 그때의 내 느낌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청춘의 그 죄 많던 열정의 정체를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그 열정은 사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나에게, 그때의 내 느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이 진실이, 나처럼 유혹의 덫에 걸릴지도 모르는 후학에게 가르침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다행이 없을 터이다. 이제 늙은이가 다 된 나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방법을 두루 안다. 이제는 낮도깨비의 유혹에서 놓여 났으니 내가 좀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때가 되었다 싶다가도 문득문득 아직은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 않아서 곤혹을 느끼고는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이것이 무엇인가,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은 지상적 정열에 굴복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과 죽음에 저항해 보려고 이러는 것인가, 하고 물어 보고는 한다.

어쨌든 당시에 나를 구한 것은 기적적인 본능이었다. 여자는 돌연 여자 자체로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과 인공의 사상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내 영혼의 직관이 지니는 힘을 빌려 이 모든 사상을 정관함으로써 여자로 인한 긴장과 갈등에서 놓여 나려 했다. 나는 외양간에서 소 떼를 끌고 나오는 목동들,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돼지치기들, 양 떼를 모으라고 번견에게 고함을 지르는 양치기, 자루를 메고 방앗간에서 나오는 농부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자연 현상에 관한 명상 안에다 나 자신을 풀어 놓음으로써, 내 생각을 지우고, 있는 그대로 자연의 형상을 바라보고, 그 형상에 의지해서 나 자신을 잊으려 했다.

아름다워라! 사악한 인간의 지혜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모습이여.

나는 어린양들을 바라보았다. 어린양들은, 그 순수하고 착한 성품을 인정받아 <어린양>이라는 이름을 상으로 받으면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일까? 실제로 어린양을 지칭하는 <아그누스>라는 명사는 어린양이 <아그노스치트>(안다, 인정한다), 즉 무리속에 있는 제 어미를 알아보고,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어미 역시, 수많은 어린양 무리에 섞여 있어도 제 새끼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제 새끼만 가려내어 젖을 먹인다. 나는 양을 바라보았다. 양은 <아브 오블라티오네>(제물)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오비스>, 즉 양이라고 불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짐승이 제물로 쓰였기 때문에 <아브 오블라티오네>라는 말이 <양>으로 꼴바꿈을 한 것이다. 양에게는, 겨울이 다가올 때면 목초가 서리에 시들기 전에 탐욕스럽게 먹어 두는 버릇이 있다. 양 떼 사이에는 개가 있었다. 라틴 어로 양 떼를 지키는 개는 <카네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짖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카노르>가 변한 말이다. 짐승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짐승, 완벽의 극치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짐승인 개는 주인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숲에서 야생 동물을 사냥하기도 하고 훈련을 받으면 이리 떼로부터 양 떼를 지키기도 한다. 개가 주인의 집이나 주인의 아들을 지킨 이야기, 목숨을 걸고 제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허다하다. 적의 무리에 포로로 잡혀가던 가라칸테스 왕이, 2백 마리의 사냥개들이 적진을 뚫어주는 데 힘입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뿐이던가? 뤼키우스의 이아손이 기르던 개는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전폐함으로써 결국 자진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뤼시마케 왕의 개는 왕이 승하하자 주인의 관에 뛰어들어 주인과 운명을 같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개에게는, 상처를 핥아서 치료하는 능력도 있다. 강아지의 혀는 위장병에 특효약이라던가? 개에게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버릇이 있다 개의 이러한 절제 행위는 정신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개의 혀가 지니는 이러한 기적적인 능력은, 고해와 참회를 통한 죄악의 정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는 것은, 고해한 뒤에도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암시는, 자연의 경이를 바라보고 있던 그날 아침의 내 마음을 위로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의 발걸음은 우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 소 떼가 목동에 쫓겨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우정과 미덕의 상징을 보았다. 소가 우정과 미덕의 상징이라는 사실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더라도 쟁기 끄는 동아리 소를 잊지 않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는 쟁기 끌던 동아리가 보이지 않으면 다정한 울음으로 불러보기도 한다. 소는, 혹 비라도 내릴 양이면 스스로 알아서 우사로 돌아온다. 비를 피하면서도 늘 바깥을 바라보는 것은 밭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비가 그치면 다시 일을 계속하기 위해 밭일을 유념하고 있는 것이다. 우사에서는 송아지도 나왔다. <비틀리>라는 말은 <비리디타스>(앳된), 혹은<비르고>(처녀)에서 유래한다. 송아지야말로 앳되고 순결한 짐승이기 때문이다. 송아지를 바라보면서, 송아지의 우아한 모습에서 기껏, 순결하지도 못한 여자를 생각한 나야말로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었던가? 나는 겨울 아침의 기분 좋은 소요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과 나 자신을 화해시킨 위대한 평화를 생각했다. 여자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여자에게 품었던 불 같은 사랑을, 내 안의 고즈넉한 평화와 행복으로 변용시키고 말았다는 편이 옳겠다.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기특한 것인가… 이런 생각도 했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니엔시스의 말마따나 하느님의 선하심은 금찍한 괴수를 통해서도 드러나니 세상은 얼마나 오묘한 것인가. 괴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뱀 중에는, 수사슴을 단숨에 삼키고, 넓디넓은 바다를 헤엄쳐 건널 만큼 큰 뱀도 있다. 나귀의 몸, 야생 염소의 뿔, 사자의 갈기와 가슴, 인간의 목소리, 소 발굽처럼 가운데가 갈라진 발굽, 귀까지 쭈욱 찢어진 악어의 입… 이런 것을 고루 갖춘 <식인 괴수>도 있다. 이 괴수의 뼈는 통뼈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얼굴, 세 줄로 난 이빨, 사자의 몸, 전갈의 꼬리, 핏빛 눈…을 하고는 뱀처럼 쉭쉭거리며 인육을 찾아 해매는 괴수도 있다. 여덟 개의 발가락, 이리 주둥이, 구부러진 발가락, 양의 털, 개의 등… 늙으면 털이 세기는커녕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까맣게 짙어져 가는, 그래서 인간보다 수명이 더 긴 괴수도 있다. 어찌 그뿐이더냐. 머리가 없기 때문에 양 어깨에 눈이 하나씩, 가슴에 콧구멍이 한 쌍 뚫린 괴물이 있는가 하면, 갠지스 강에서 사과 냄새만 맡고 사는 괴물로, 그 강을 떠나기만 하면 죽어 버린다는 것도 있다. 그러나 개가 그러하고, 소, 양, 살쾡이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생긴 괴수들도 나름의 목소리로 다 창조주와 그이의 지혜를 찬미한다. 뱅상 드 보배(이탈리아 어 이름은 빈첸초 벨로바첸제, 라틴 어 이름은 빈첸티우스 벨로바첸시스. 프랑스의 도미니크 회 수도사, 중세의 백과 사전 편찬자. <큰 거울>이라는 이름의 전 80권으로 된 방대한 백과 사전을 편찬한 바 있다. 이 백과 사전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반영한다는 뜻에서 제목을 <큰 거울>이라고 한 듯하다. 이 책에는 민간의 미신이나 근거 없는 속설도 많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의 말마따나 이 세상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사실은 얼마나 고귀한 것이며, 우주에 어울리게 갖추어진 온갖 사물의 꼴과 수와 냄새, 태어난 것의 죽음으로 확인되는, 생성과 소멸을 통한 시간의 주기에 대한 통찰이 이성의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었던가. 내 비록 한때는 영혼을 육신의 노예로 전락시킨 죄인이었다. 그러나 고백컨대 나는 곧 그 죄를 참회하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창조주와 이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하고, 기꺼이 창조의 크심과 그 견인불발에 고개를 숙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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